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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수한 메밀의 계절, 가을

Jadam | 201511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의 시 ‘국수’ 중에서 -. 멋과 맛을 아는 모던보이 백석이 감탄하며 반긴 건 뽀얀 밀가루 국수가 아니라 ‘히수무레’한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국수였다. 깊어진 하늘빛 때문일까. 멋쟁이 시인도 반해버린 수수한 메밀국수 생각이 점점 간절해진다. 

 

pmo웹진15가을_메밀_메인

 

가을에 거둬 겨우내 먹어요
메밀은 씨를 뿌린 후 두세 달이 지나면 수확이 가능하고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 구황작물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대 재배지이자 생산지는 뜻밖에 제주. 메밀이 강원, 봉평에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일 것이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 속 주인공 허생원과 동이가 만난 “더운 햇살이 등줄기를 훅훅 볶는 여름”이 곧 메밀꽃 필 무렵이다. 소금 알갱이 같이 아련한 메밀꽃은 9월에 만개하고 꽃이 떨어지면 마침내 열매 곧 낟알이 맺히고 여문다.
메밀은 지금, 가을에 거둬 겨우내 먹는 곡물이다. 백석은 겨울밤 “쩔쩔 끓는 아르궅(아랫목)”에 앉아 메밀국수를 먹었고, 메밀묵(찹쌀떡과 환상의 커플)이 으뜸 밤참으로 날리던 때도 겨울이다. 고유의 찬 성질 때문에 언젠가부터 여름에 많이들 찾는데 건강과 미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은 계절 구분 없이 별미로 메밀을 즐긴다. 

풍부한 단백질, 소화효소도 들어있어
메밀은 다른 곡물에 비해 단백질이 풍부하다. 같은 무게의 두부보다 많으며 두부처럼 포만감을 높여주기에 다이어트에 그만이다. 메밀에는 전분 분해 효소 등 다양한 소화효소가 들어있어 메밀로 만든 음식은 소화가 잘 된다. <동의보감>에는 “비 위장에 일 년간 쌓인 체기가 있어도 메밀을 먹으면 내려간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또 루틴이라는 항산화 물질이 들어 있고 아미노산, 나이아신, 섬유소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혈관 건강과 고혈압, 당뇨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 단, 껍질에 살리실아민이라는 성분이 소량 들어있는데(도정 과정에서 껍질을 벗겨내니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지만) 이 독성물질을 해독하는 게 무다. 메밀국수를 먹을 때 무절임이 함께 나오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메밀의 찬 성질은 평소 몸이 찬 사람의 경우 배탈을 일으킬 수 있으니 만약 면으로 먹는다면 열이 나는 겨자를 넣거나 온면으로 먹는 것이 좋다. 

메밀가루로 수제비 빚고, 묵, 죽도 쑤고
메밀은 밀처럼 주로 가루를 내어 먹는다. 메밀이 우리 땅에서 재배된 건 삼국시대 이전부터이니까 이 땅엔 원래 밀가루가 아니라 메밀가루가 일반적이었다. 메밀을 빻아 가루를 내어 전을 부치고 수제비를 빚고 만두를 빚었다. 묵이며 죽을 쑤었다. 반죽을 해서 썰고 뽑아 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메밀로 만든 음식 중 가장 많이 먹는 건 역시 국수다. 옛날에는 국수라고 하면 모두 메밀로 만든 메밀국수였다. 

메밀국수의 메밀 함량 관심
지금은 메밀국수라고 하면 막국수, 평양냉면, 그리고 일본식 메밀국수인 소바를 이른다. 방송에서 평양냉면이 종종 다뤄지면서 최근 메밀 함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오직 메밀가루만 넣어 면을 뽑는 메밀국수 가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다. 만들지 못 한다기보다는 만들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싶다. 메밀의 함량은 면의 맛과 식감을 좌우한다. 메밀은 글루텐이 거의 없어 반죽을 하면 잘 뭉쳐지지 않아 예로부터 밀가루나 전분가루를 섞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밀가루로 면을 만들 때처럼 반죽을 늘려 뽑지 않고 칼로 썰거나 국수틀에 넣어 눌러 뽑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메밀가루만 넣어 뽑은 메밀면은 맛은 더 구수할지언정 뚝뚝 끊어져 그 식감이 쫄깃 탱글과는 거리가 멀다. 

메밀막국수, 냉모밀 라면도 인기
어느새 메밀과 밀의 자리가 바뀌어 메밀가루가 밀가루보다 몇 곱절 비싸다. 익숙한 음식 앞에 ‘메밀’이 붙으면 왠지 더 각별하다. 메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식품회사에서는 메밀 만두 등 메밀이 든 갖가지 음식들을 선보이고 있다. 가장 반응이 좋은 건 역시, 면에 메밀가루를 넣어 뽑은 사계절 별미 라면. 풀무원 생라면 ‘자연은맛있다’ 시리즈인 ‘황태메밀막국수’와 ‘가쓰오메밀냉소바’ 속 메밀의 함량은 10퍼센트로 다른 메밀 라면들에 비해 곱절 이상 높다. 메밀의 맛과 라면의 쫄깃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을 위해 찾은 최고의 비율이란다.
국수의 계절이 따로 있을까마는 “후루룩” 소리와 함께 매끄러운 면발 사이로 일어나는 구수한 메밀 바람을 느끼노라니 마음속에도 살랑 바람이 인다. 그 음식에 너무 익숙해져버려 먹는 재미가 덜해졌다면 ‘메밀’을 붙여 먹어보길. 뜨거운 여름과 시린 겨울 사이, 감성이 가득 차오르는 가을처럼 평범한 일상에 ‘고담’한 느낌표가 되어줄 것이다. 

글을 쓴 한정혜는 음식과 문화, 환경 속에 깃든 이야기를 찾아 글을 짓고 알리는 일을 한다. 바람은 자연스럽게, 맛있게, 일하기.

CREDIT

프리랜서 작가 한정혜

사진톤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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